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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와 “크루즈 패밀리”

석가탄신일엔 아내와 “위대한 개츠비”를, 아이들과 “크루즈 패밀리”를 보았습니다. 이젠 하루에 두 편 이상의 영화를 보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날도 있는 법이죠.

바즈 루어만이 “위대한 개츠비”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나 때깔은 참 곱겠구나라고 기대했겠죠. 그리고 결국 때깔만 곱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현란한 시각 효과가 과시적으로 사용됩니다. 심지어 닉 캘러웨이의 나레이션도 화면에 또박 또박 적어주지요. 행여 지루할까봐 글자가 날아다니는 시각효과도 매 문장마다 바뀝니다. 세상에.

마치 이런 느낌이에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교과서에 형형 색색의 펜을 이용해 모든 중요한 부분들을 예쁘게 꾸며놓는 것 말입니다. 얼핏 보기엔 화려하고 공도 많이 들였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은 찾을 수 없어 공부엔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것 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예쁜 쓰레기입니다.

이런 점들은 많습니다. 1920년대의 성대한 파티를 다루는데 음악을 Jay Z 가 맡는 것 같이 말이죠. 시대성을 탈색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 줄 수 있습니다만, 그러려면 전체적인 서사에서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는 지가 명확해야죠. 탐욕과 위선의 정점이 지금이 아니라면 인류의 미래는 기대할 게 없다고 여겨질 만한 시대에 만들어지는 개츠비가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나 다룰 법한 뻔한 로맨스에만 기대고 있으리라 누가 상상할 수 있겠어요?

배우들의 연기는 좋은 편입니다. 토비 맥과이어는 스파이더맨에서의 캐릭터를 잘 차용해 쓰면서도 새로운 길로 나아갑니다. 디카프리오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좋더군요. 특히 개츠비가 부캐넌과 호텔방에서 다투다가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의 연기는 매혹적입니다. 디카프리오 그 자신도 신경증적인 캐릭터들에 과하게 몰입하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될 정도로요.

화려한 볼거리에도 불구하고 후한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아마 “위대한 개츠비” 원작을 제가 유달리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을 위해 함께 보았던 “크루즈 패밀리”는 아주 만족스럽더군요.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옛 방식을 고수하려는 고집 센 아버지와 늘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는 딸이 갖는 갈등과 그 해소가 주된 이야기입니다. 이를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색다른 생태계 속에 잘 버무려 놓는 것입니다. 시놉시스만 봐도 도저히 보러 갈 마음이 들지 않는 류의 영화였죠. 하지만 한껏 낮아진 기대치 때문이 아니라 정말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입니다. 

우선 주인공들의 생김새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캐릭터 상품으로 내놓으면 전혀 팔릴 것 같지 않게 생겼습니다. 네. 못생겼어요. 하지만 극중 설정과 딱 들어맞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보면 낯설지만 이야기가 전개되어 갈수록 완전히 몰입하게 되지요. 그러고 보면 드림웍스는 슈렉 때부터 못난이 캐릭터로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는 듯 합니다.

리듬도 아주 좋습니다. 재기 발랄한 농담과 스피디한 액션들이 용의 주도하게 안배되어 있습니다. 각 캐릭터의 스토리를 주고 받는 과정 또한 덜컹거림없이 매끈한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족 영화와 성장 영화의 얼개를 갖고 있으므로 꽤나 뻔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다른 것은 집안의 가장인 아빠가 가장 미숙하며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빠의 성장담입니다. 이게 보면 볼 수록 미묘한 것이, 아빠와 딸의 갈등 구조 속에서 사실상 딸이 변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구성원 중에서도 이렇다할 성장을 보이는 사람은 아들 뿐인데 이 아들 역시 아빠를 좀 닮아 있습니다. 즉, 아빠와 아빠를 닮은 사람만 변하면 가족 전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늘 고군분투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위험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던 아빠의 각성을 지켜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얼빠진 수컷들의 헛된 기함이 한 달 내내 머릿기사로 다뤄지고 있지요. 그들을 가장으로 둔 가족에 대한 연민이 새삼 일어나는군요. 

에반게리온 Q

에바시리즈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수 년전 처음 들었을 때 먼저 나왔던 말은 “도대체 왜?”였습니다. “서”가 불러일으킨 호기심과 새 플롯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 “파”의 놀라움 뒤에 위치한, 그리고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국내 개봉이 결정된 “Q”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요?
제 경우엔 이 시리즈가 왜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지 또 의문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캐릭터와 설핏 다른 방향으로 서사가 흘러가지만 기본적인 메시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추가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을 거란 추측은 더 못하겠단 뜻입니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새로운 형식이 필요했던 걸까요? 놀라운 기술적 진보가 엿보이지만 대사들 중 일부는 여전히 후지고 유치하며 내러티브의 장악력, 연출등은 외려 퇴보했습니다. 완결편에서 만회하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걸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에바시리즈가 이토록 광범위한 팬덤을 갖게 된 것은 주제의식보다는 그를 보여주는 방식의 특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와 상징만 내비치고 중요한 연결고리들을 모두 숨김으로 인해 모호함이 생겨났죠.
결국은 인정투쟁중인 주인공들의 괴랄한 성장담과 사회문제시되던 히키코모리를 위한 제언을 기독교의 묵시록의 형식을 살짝 변형해서 접목해서 어처구니 없는 스케일로 만들어냈죠. 개인적으론 국내에서 이 작품이 괜한 신성모독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살짝 신기하기도 합니다.
어쨌건 이 TV 시리즈는 뒤로 갈수록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지나치게 비장하긴 했어도 TV엔딩 역시 전 좋았습니다. 엔드오브에바는 꽤 착실한 서비스였구요.

혼자만의 방에서 벗어나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살을 부비길 권하지만 정작 에바의 세계에 갇혀버린건 안노 히데야키 본인인 듯 합니다. 스타워즈에 집착했던 조지 루카스의 전철을 밟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래봅니다.

“스토커”,”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박찬욱 감독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였죠. 이건 비교체험 극과 극 같은 느낌이네요. 이토록 스타일이 다른 영화를 함께 보니 자연스레 비교가 되어 더욱 재미있더군요.
스토커는 잔혹한 성장담입니다. 시종 불길한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그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솔직히 각본이 훌륭하단 느낌은 아닙니다. 이야기 설정의 상당분은 극중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라토레로부터 빚진 것이죠. 그리고 그 재료를 박찬욱스럽게 가공했습니다. 모호한 전반부와 풀어지는 후반부의 균형이 좀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촬영, 편집, 미술, 음향, 음악을 사용하는 방법들은 황홀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사운드의 활용과 함께 이루어지는 장면 전환들은 창의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사운드는 기능적으로도 중요한데, 서로 다른 시간대에 벌어지는 사건을 하나의 음악 또는 음향 효과 위에 배치하여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죠.
영화의 시작과 끝은 같은 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아의 삶은 매해 같은 신발을 생일 선물로 받던 과거에서 훌쩍 걸어나옵니다. 누구에게도 응원받지 못할 성장을 한 채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조금 달라진 홍상수의 신작입니다. 반복과 차이를 보여주는 방식도 약간 변했습니다. 예전보다 그 반복의 강도 및 변화가 작습니다. 즐겨 사용하던 챕터 구분이 없어진 대신 해원의 일기 형식을 빌어 시간을 구분합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이물감이 들 정도도 아니구요. 이는 이 영화가 전작들과는 달리 거의 온전히 해원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것과 관계가 있을겁니다.
“스토커”를 보고 난 후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재미있었던 건 두 감독의 음악을 쓰는 방법의 차이였습니다. “스토커”에서는 음악이 매우 중요한 장치이며 음악이 쓰이지 않은 씬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 홍상수 감독의 이번 영화는 그나마 음악이 많이 쓰인 편에 속함에도 곡은 딱 하나 베토벤의 7번 교향곡입니다. 그것도 이선균의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현장음 그대로 들려줄 뿐이죠. (카세트 테이프라니!)
그런데 이게 또 마법과 같은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해원과 이선균이 계단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 끝이 딱 들어 맞는거죠. 이게 계산되지 않았다는데 만원 걸어봅니다.
유준상과 예지원 커플의 등장은 가장 유머러스한 부분입니다. 하하하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부분이 정말 재미있을 겁니다. 극중 해원이 읽다 잠든 책은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오고 극중 가장 많이 토로되는 감정은 힘들다이거든요.

하루에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게 박찬욱과 홍상수의 작품이었다면 오늘은 좋은 날로 기억해도 충분하겠지요. 즐거웠습니다.

늑대아이를 보았습니다.
지금 제게 가장 좋은 애니메이션 세 편을 꼽으라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 “Wall-E”와 함께 이 작품 “늑대아이”를 고르겠습니다.
이제는 분명해 진 것 같습니다.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은 다른 애니메이션과 경쟁하지 않을겁니다. 언젠가 그의 작품이 영화제에서 주요한 상을 수상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선, 각본이 너무나 좋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키와 아메를 함께 키우고 또한 함께 성장해 나가는 느낌이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반짝이는 설정과 풍부한 상상력을 끌어주는 이야기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은 반대입니다. 작은 설정에서 풍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관객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곁가지들을 아주 그럴싸하게 그려냅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은 더욱 뛰어납니다. 제가 놀랍게 느꼈던 것은 이 작품에서의 카메라 워크와 화면 전환입니다. 이 작품에서 카메라를 인식하고 사용하는 방법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대화 혹은 대사의 내용과 정확하게 조응하며 움직이는 화면들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장점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구나라는 경탄을 자아냅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마코토가 달리는 장면을 마치 패닝하듯 찍은 장면과 같이 말입니다.
특히 아메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Up”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부부의 일생을 압축해서 보여줬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오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영화를 보는 것이란 행복한 일입니다.
그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라면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일생에 몇 번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늑대아이를 보았습니다.

지금 제게 가장 좋은 애니메이션 세 편을 꼽으라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 “Wall-E”와 함께 이 작품 “늑대아이”를 고르겠습니다.

이제는 분명해 진 것 같습니다.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은 다른 애니메이션과 경쟁하지 않을겁니다. 언젠가 그의 작품이 영화제에서 주요한 상을 수상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선, 각본이 너무나 좋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키와 아메를 함께 키우고 또한 함께 성장해 나가는 느낌이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반짝이는 설정과 풍부한 상상력을 끌어주는 이야기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은 반대입니다. 작은 설정에서 풍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관객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곁가지들을 아주 그럴싸하게 그려냅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은 더욱 뛰어납니다. 제가 놀랍게 느꼈던 것은 이 작품에서의 카메라 워크와 화면 전환입니다. 이 작품에서 카메라를 인식하고 사용하는 방법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대화 혹은 대사의 내용과 정확하게 조응하며 움직이는 화면들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장점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구나라는 경탄을 자아냅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마코토가 달리는 장면을 마치 패닝하듯 찍은 장면과 같이 말입니다.

특히 아메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Up”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부부의 일생을 압축해서 보여줬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오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영화를 보는 것이란 행복한 일입니다.

그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라면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일생에 몇 번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파이이야기 혹은 라이프 오브 파이

얀 마텔의 파이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이죠. 둘 다 보지 못한 분이라면 영화를 먼저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흔치 않게도 소설, 영화 둘 다 매우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순서상 영화를 먼저 보는 편이 나은 이유는 소설 속의 서사가 더욱 확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이를 영화화한 이안 감독의 시선에 동의할 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겁니다.

무척이나 깊고 넓은 이야기입니다. 파이라는 수 처럼요. 원과 지름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뿐인 이 수가 무한의 복잡성을 갖듯이, 두 시간여의 영화 혹은 10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우리의 삶의 불가해함을 다룰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놀라운 통찰을 “파이”라는 이름에 농축시킨 작가의 센스는 수학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입니다.

이안 감독은 필모그래피가 상당히 어지럽기로 유명하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감독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감독들은 흔하죠. 하지만 생소해 보이는 조합으로 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생산해 내는 감독은 거의 없습니다. 이번에도 멋지게 해냈군요. 누구나 촬영에 대해 얘기할 겁니다.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 장면들을 여럿 제공하니까요. 이 작품의 각색 또한 매우 훌륭합니다. 원작을 충실히 살리고 아주 약간의 수정을 가했습니다. 세심하게 들여다 보지 않으면 잘 느끼지 못할 그 차이 덕에 감독의 색깔이 드러납니다. 또 얘기거리도 풍성해 집니다. 그 차이란 파이와 신부님의 첫 만남, 일본인 조사원과 나눈 얘기를 작가와의 대화로 바꾼 부분, 의도적인 몇몇 대화의 삭제, 그리고 표류중 만난 다른 조난자 이야기의 삭제 등입니다. 이 몇가지 수정으로 제법 결이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마도 많은 영화 리뷰어들이 영화의 끝부분을 반전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겁니다.

책은 좀 더 열려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마지막 부분은 반전이라기 보다 사유의 확장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멍해지기는 합니다만.

인생과 종교와 예술(특히 문학)에 대한 통찰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능숙하게 버무려 낸 솜씨가 일품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 관심이 생기는군요.

작디 작은 구명보트에 무시무시한 맹수와 단 둘이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것이 인생이라면, 10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로 삶을 풀어내는 것이 곧 문학이자 예술이겠지요. 물론 당장은 날카로운 이성과 운명에 순종하는 종교적인 신앙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배멀미를 견뎌야겠지요.

One Man Les Miserables Nick Pitera Medley (by Nick Pitera)

AMOUR (아무르)를 봤습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 본 느낌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다음 말에 동의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를 다루는 게 아니라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전작들과는 사뭇 느낌이 다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제목과도 같이 숭고한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던 주인공이 겪는 결말은 이 작품이 누군의 것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줍니다.

인간극장 소재로나 어울릴 법한 단순한 얘기로도 이토록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습니다. 손쉬운 최루와 표피적 감정을 걷어내고 직시하는 죽음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형식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납니다. 미쟝센은 촘촘하고 카메라와 배우의 동선은 치밀하다 못해 숨막힙니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긴장감이 철철 넘쳐 흐르는 것은 이토록 완벽한 통제와 탁월한 연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음악은 실제 연주와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즉, 감정을 고양하는 배경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음향으로서의 음악만 존재합니다. 섣부른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쓴 흔적입니다.

분석하고픈 숏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에 힘이 빠지는군요. 별도의 분석의 도움이 없어도 이 영화가 주는 성찰의 힘은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의 영화로 꼽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년초에 개봉했던 멜랑콜리아와 비교해서 본다면 더욱 우울한 연말을 보낼 수 있겠군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에 대해 폐부 깊숙히 찔러넣는 영화입니다.

삶의 무게는 결국 죽음의 무게임을.

이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을까요? 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잔상은 평생을 따라 다닐테니까요.

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 콘서트 영상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고 보시길.

007 스카이폴을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만족스럽군요.

솔직히 극장에서 007 영화를 본 건 거의 20년 만입니다. 그간 이 시리즈에 별 흥미를 못 느꼈지요. 이건 저 뿐만이 아닐겁니다. 한 때 최고의 프렌차이즈였던 007 시리즈는 쇠락의 기운이 강했습니다.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일까요?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기복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하긴 힘듭니다. 제임스 본드는 여전히 기상천외한 신무기를 들고 세계를 헤집으며, 마티니를 젓지 않고 흔들어 마셨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공산권이 붕괴된 이후 낭만적인 스파이가 설 자리는 세상에도 관객의 마음에도 없는 듯 합니다. 하여 2000년대 스파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3부작을 온전히 바치거나(제이슨 본 시리즈) 냉전시대의 음울한 기억속(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만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들이 차지하던 영예는 코믹북 속의 슈퍼 히어로들에게 내 준 채로 말이죠. 한마디로 007은 구식이며 유행이 지났습니다(old fashioned).

샘 멘데스는 50주년을 맞이한 이 올드한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리부트해냅니다. 근자에 우리는 많은 시리즈 영화들의 리부트를 목격해 왔지요. 스카이폴은 기존 시리즈와 올드 팬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이 작업을 해냅니다. “부활”은 이 영화의 키워드이기도 하지만 시리즈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는 단어로도 적절합니다. 이 영화의 끝은 새로이 태어난 007의 시작인 셈입니다. 오프닝과 엔딩 스코어가 이를 잘 나타내 줍니다. 아마도 스카이폴은 그 유명한 제임스 본드 테마로 시작하지 않는 유일한 007 영화일 겁니다. 그 자리를 꽤 장중하고 음울한 음악이 아델의 목소리로 채워지죠. (이 장면은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본드 테마는 이 영화의 끝장면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시리즈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깊이가 별로 없는 인물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할당해 주는 것입니다. M, Q, 머니페니 등이 그 수혜자이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한 50주년 선물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 시리즈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 혹은 젊은 세대의 손을 잡는 법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영리한 방법이죠. 그런데 심지어 감동적입니다. 올드팬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요.

이후 이 시리즐 맡는 감독들은 샘 멘데스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겁니다. 이제 큰 고민없이 어떠한 방향으로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게 되었죠. 그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들은 물론 제작자들이겠지만요. 

연령대에 상관없이 충분히 즐길 만합니다만 숀 코너리나 로저 무어가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 믿고 애스턴 마틴을 최고의 본드카라고 생각하는 올드팬들이 아무래도 더 즐거울 것 같군요. 시리즈에 바치는 헌사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관람하자마자 바로 쓰는 글이기도 하고, 새벽이며, 무엇보다 글재주가 없는 관계로 역시 두서없군요. 뭐 어쩌겠어요.

서울 국제 초단편 영화제 (SESIFF) 대상 수상작 Tommy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데는 2분이면 충분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