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웨스 앤더슨

호화로운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웨스 앤더슨의 신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봤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그리 많이 본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전작 문라이즈 킹덤도 놓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의 특징은 단 한 편을 본다 해도 바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특징들의 결정체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빼어난 것들 중 하나는 미장센입니다. 수직/수평을 기본으로 하는 화면 구성과 빈티지한 느낌의 색감은 그의 인장입니다.
집착이 느껴질 정도로 대칭적인 화면 구도는 기이한 정갈함을 전해줍니다.
인물이 한 명일때는 반드시 중앙에 배치하고, 두 명인 경우에는 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합니다.
두 명이 있던 공간에 세번째 인물이 들어서게 되는 경우에는 역시 가운데 배치되지요. 
이러한 배치에 미학적 고려만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화면을 균등하게 배분받은 덕분에 두 인물간의 사회적 지위가 잘 드러나지 않고 평등하게 다루어 지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호텔 컨시어지와 갓 들어온 벨보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동료로서 다루어집니다.
최고의 부호와 별볼일 없는 작가는 목욕할 때에도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에도 동일한 대접을 받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선 권세있는 사람들을 처음 등장시킬 때 일반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마담 D나 무스타파가 처음 등장하는 씬에서 그들의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 앙각으로 찍지 않고 오히려 약간 높은 곳에서 내려찍게 됩니다.
거의 패닝과 주밍만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각도”가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이 부분들 뿐입니다.
따라서 관객은 이들의 사회적 배경에 휘둘리지 않고 동등한 거리감을 모든 인물들에게 부여할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순간들은 카메라가 움직일 때 혹은 새로운 씬의 시작점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카메라 움직임의 대부분은 패닝과 주밍입니다. 카메라가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경우도 많은데 거의 대부분 90도 단위로 움직입니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이 즐거운 이유는 이것을 단지 시선의 변경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동선, 대사 뿐 아니라 음향효과, 조명, 세트 등 모든 연출 요소가 카메라 움직임에 따라 긴밀하게 변합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보는 것은 가끔 잘 조직된 서커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게 바로 이런 묘기 때문입니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촬영 장면의 대본을 숙지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긴밀하게 약속을 해서 자신이 간여할 정확한 지점에 제대로 일을 해야 하지요.
얼핏 생각해봐도 대단히 힘들 것이라 생각되지만 영화를 보면 분명 그들이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탄을 하면서 본 장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새로운 씬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주는 재미는 위의 카메라 움직임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든 씬이 변경되든, 심지어 숏이 달라지든 화면이 변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유예 혹은 지연이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을 때 하나, 둘, 셋을 기다리는 것처럼 언제나 변경된 화면 속 인물들은 정지된 상태에서 잠시 머무릅니다.
갑작스레 바뀐 화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잠시 멈춰 있다가  대사를 하거나 행동을 시작합니다.
돌발된 이미지의 효과를 최대한 각인시키려는 듯한 이러한 효과는 영화의 문법이 아니라 사진의 문법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는 1930년대 장면에서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화면비율을 이용하는데 이것이 더욱 사진적으로 보이게 하는 한 요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러한 효과는 웃음을 유발시키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영상미를 강렬하게 인지시키는데에도 한 몫 합니다.
카메라가 급격하게 움직인 후에도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건 컷분할 효과를 컷을 나누지 않고도 가져옵니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선 형식이 중요합니다. “다즐링 주식회사”를 보면서 저는 그 형식에 완전히 사로잡혔지만 과연 형식이 내용과 조응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정말 절묘하게 이 작업을 수행해 냈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몇 겹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현재 시점에서 한 여자가 어떤 작가의 기념비를 찾아갑니다.
이 짧은 인트로의 바로 뒤에 작가가 살아서 자신의 옛 이야기를 회고하려는 부분이 나옵니다. (1985년)
다시 젊은 시절의 작가가 비로소 영화 제목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찾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1960년대)
그리고 거기서 만난 무스타파의 입을 통해 비로소 극의 중심인 1930년대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영화가 끝날 때에는 정 반대의 순서로 빠져나옵니다.
총 4겹의 이야기에 서브 플롯까지 포함하면 수많은 겹이 둘러쳐져 있는 셈이지요.(영화에선 이 각각의 겹에 서로 다른 화면비율과 색조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구스타프의 이야기를 무스타파로부터 전해들은 작가가 노년에 쓴 소설을 추억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서사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메인스토리의 주인공인 구스타프는 그럴싸한 인물임을 연기하는 자입니다.
요약하자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대한 영화처럼 보입니다.

웨스 앤더슨은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유쾌한 악동은 어느덧 거장의 길을 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웨스 앤더슨

호화로운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웨스 앤더슨의 신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봤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그리 많이 본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전작 문라이즈 킹덤도 놓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의 특징은 단 한 편을 본다 해도 바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특징들의 결정체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빼어난 것들 중 하나는 미장센입니다. 수직/수평을 기본으로 하는 화면 구성과 빈티지한 느낌의 색감은 그의 인장입니다.

집착이 느껴질 정도로 대칭적인 화면 구도는 기이한 정갈함을 전해줍니다.

인물이 한 명일때는 반드시 중앙에 배치하고, 두 명인 경우에는 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합니다.

두 명이 있던 공간에 세번째 인물이 들어서게 되는 경우에는 역시 가운데 배치되지요. 

이러한 배치에 미학적 고려만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화면을 균등하게 배분받은 덕분에 두 인물간의 사회적 지위가 잘 드러나지 않고 평등하게 다루어 지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호텔 컨시어지와 갓 들어온 벨보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동료로서 다루어집니다.

최고의 부호와 별볼일 없는 작가는 목욕할 때에도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에도 동일한 대접을 받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선 권세있는 사람들을 처음 등장시킬 때 일반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마담 D나 무스타파가 처음 등장하는 씬에서 그들의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 앙각으로 찍지 않고 오히려 약간 높은 곳에서 내려찍게 됩니다.

거의 패닝과 주밍만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각도”가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이 부분들 뿐입니다.

따라서 관객은 이들의 사회적 배경에 휘둘리지 않고 동등한 거리감을 모든 인물들에게 부여할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순간들은 카메라가 움직일 때 혹은 새로운 씬의 시작점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카메라 움직임의 대부분은 패닝과 주밍입니다. 카메라가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경우도 많은데 거의 대부분 90도 단위로 움직입니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이 즐거운 이유는 이것을 단지 시선의 변경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동선, 대사 뿐 아니라 음향효과, 조명, 세트 등 모든 연출 요소가 카메라 움직임에 따라 긴밀하게 변합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보는 것은 가끔 잘 조직된 서커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게 바로 이런 묘기 때문입니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촬영 장면의 대본을 숙지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긴밀하게 약속을 해서 자신이 간여할 정확한 지점에 제대로 일을 해야 하지요.

얼핏 생각해봐도 대단히 힘들 것이라 생각되지만 영화를 보면 분명 그들이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탄을 하면서 본 장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새로운 씬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주는 재미는 위의 카메라 움직임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든 씬이 변경되든, 심지어 숏이 달라지든 화면이 변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유예 혹은 지연이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을 때 하나, 둘, 셋을 기다리는 것처럼 언제나 변경된 화면 속 인물들은 정지된 상태에서 잠시 머무릅니다.

갑작스레 바뀐 화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잠시 멈춰 있다가  대사를 하거나 행동을 시작합니다.

돌발된 이미지의 효과를 최대한 각인시키려는 듯한 이러한 효과는 영화의 문법이 아니라 사진의 문법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는 1930년대 장면에서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화면비율을 이용하는데 이것이 더욱 사진적으로 보이게 하는 한 요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러한 효과는 웃음을 유발시키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영상미를 강렬하게 인지시키는데에도 한 몫 합니다.

카메라가 급격하게 움직인 후에도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건 컷분할 효과를 컷을 나누지 않고도 가져옵니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선 형식이 중요합니다. “다즐링 주식회사”를 보면서 저는 그 형식에 완전히 사로잡혔지만 과연 형식이 내용과 조응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정말 절묘하게 이 작업을 수행해 냈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몇 겹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현재 시점에서 한 여자가 어떤 작가의 기념비를 찾아갑니다.

이 짧은 인트로의 바로 뒤에 작가가 살아서 자신의 옛 이야기를 회고하려는 부분이 나옵니다. (1985년)

다시 젊은 시절의 작가가 비로소 영화 제목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찾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1960년대)

그리고 거기서 만난 무스타파의 입을 통해 비로소 극의 중심인 1930년대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영화가 끝날 때에는 정 반대의 순서로 빠져나옵니다.

총 4겹의 이야기에 서브 플롯까지 포함하면 수많은 겹이 둘러쳐져 있는 셈이지요.(영화에선 이 각각의 겹에 서로 다른 화면비율과 색조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구스타프의 이야기를 무스타파로부터 전해들은 작가가 노년에 쓴 소설을 추억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서사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메인스토리의 주인공인 구스타프는 그럴싸한 인물임을 연기하는 자입니다.

요약하자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대한 영화처럼 보입니다.

웨스 앤더슨은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유쾌한 악동은 어느덧 거장의 길을 가려 하고 있습니다.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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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m #movie #웨스 앤더슨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노아 - 대런 애르노프스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노아의 방주 사건을 다룬 영화에 새삼 스포일러 주의가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노아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만 성경에서 빌려와 새로운 틀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관객들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독 역시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오래 전 존 휴스턴이 만들었던 “천지창조” 류의 영화를 떠올리며 기대했거나 실망했을 사람들에게 모두 기대에 어긋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노아의 플롯을 따라가지만 정작 이야기 구조는 성서의 다른 인물들인 카인과 아벨, 아브라함과 이삭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킵니다.
이토록 구약의 인물들을 뒤섞어 재창조한 인물 노아의 이야기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종교적인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영화는 노아라는 인물의 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그렇다고 대자본을 이용한 재난영화 공식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기대보다 크게 어둡습니다.

성서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면 대충 얼개가 보입니다.
우선 영화속 장소는 어떻게 보더라도 구약성서 속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천지창조의 신화를 공유하는 전혀 다른 별을 다룬 SF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신비한 광물을 채취하고 불을 피우는 방식 또한 마술적입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대낮에도 하늘엔 별이 빛나고 있기도 합니다.
극중 노아가 천지창조의 과정을 자녀들에게 설명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요약해서 그대로 읽어줍니다.
하지만 그때 흐르는 화면은 빅뱅이론에 의한 우주의 탄생과 진화론에 의한 생명의 탄생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성경의 설정을 빌려와 자신만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기록적으로 오래 살았던 노아는 성경에서 600세가 되던 해에 홍수를 맞지만, 영화에서는 이 시간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크게 단축시킵니다.
짧은 시간에 모든 생물들이 탈 수 있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설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watcher”라는 존재입니다.
타락천사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영화속 노아는 성경속 인물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방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설정은 노아의 자녀들에 관한 것입니다.
노아에겐 셈,함,야벳이란 세 아들이 있었고 성경에선 그들 모두 아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셈에게만 여자가 있습니다.
야벳은 아직 어린 아이로 그려지니 성인이면서 짝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인물은 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의 결이 생깁니다.

성경 최초의 살인사건의 주인공인 카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영화 노아에선 이 이야기의 원형이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합니다.
극중 함은 형 셈이 짝을 갖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부러워하지요.
그리하여 함은 자신이 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아버지 노아를 위태롭게 할 선택을 합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재판이 되려는 셈이지요.
창조주는 아담의 원죄와 카인의 후예들로 인해 더럽혀진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 하는데 정작 생명의 방주 안에서는 이런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첫번째 아이러니입니다.

대홍수가 벌어진 이후도 살펴보지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동물들은 모두 쌍을 이루어 방주에 탑승합니다.
이들은 모종의 약으로 인해 모두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방주 속 생물들을 제외한 모든 목숨들이 멸절되는 상황.
이 상황에서 방주 안쪽은 생명을 담보하는 절대공간이지만 영화속에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잠들어 있는데 이는 마치 죽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방주 안쪽은 어둡고 음침하게 그려지는데 이로 인해 노아 일가족은 생명선에 탔다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바깥으로부터 애타게 구원을 호소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아비규환이 계속해서 노아의 가족들을 괴롭힙니다.
방주는 살아남은 자의 지옥과도 같은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두번째 아이러니입니다.

노아는 이런 상황을 인간의 멸절을 암시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손으로 갓 태어난 손녀들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얼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는 상황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들에게 겨눈 칼을 거둡니다.
영화에서 노아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뜻에 따라(창조주의 뜻에 반해!) 손녀들에게 겨눈 칼을 거둡니다. 
세번째 아이러니입니다.

극 초반 노아는 우리가 알고 있던대로의 의인입니다.
하지만 중반을 지나치며 노아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은 광기입니다.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분열증적인 인물을 그리는데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허물어져 혼돈을 겪고 있는 인물들을 꾸준히 그리고 있습니다.
노아는 스스로가 말하는 “정의”와 “인간애” 사이에서 급격하게 허물어져 갑니다.

이처럼 성경속의 설정들을 빌려와 철저히 뒤집어가며 “인간”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시도합니다.
무엇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함일 터입니다.
성공적이진 않아 보입니다.
자신이 벌려놓은 이야기를 주체못해 어정쩡하게 마무리짓는 것이 보입니다.
물론 거대 자본을 이런 이야기에 쏟아 부은 제작사의 입김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장대한 스케일로 이토록 묵직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점은 무척 부럽습니다.

함은 결국 가족을 떠나 카인의 후예처럼 살게 될 것이고, 노아는 “정의”를 버리고 “인간애”를 택하여 손녀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선 무심한 듯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끝없이 펼쳐집니다.

영화관에서 당신이 가지고 나올 감정이 무엇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리 쉽게 이 이야기를 무슨 색깔로 단정짓지는 못하리란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교계로부터의 불필요한 논쟁이 붙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노아 - 대런 애르노프스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노아의 방주 사건을 다룬 영화에 새삼 스포일러 주의가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노아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만 성경에서 빌려와 새로운 틀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관객들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독 역시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오래 전 존 휴스턴이 만들었던 “천지창조” 류의 영화를 떠올리며 기대했거나 실망했을 사람들에게 모두 기대에 어긋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노아의 플롯을 따라가지만 정작 이야기 구조는 성서의 다른 인물들인 카인과 아벨, 아브라함과 이삭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킵니다.

이토록 구약의 인물들을 뒤섞어 재창조한 인물 노아의 이야기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종교적인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영화는 노아라는 인물의 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그렇다고 대자본을 이용한 재난영화 공식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기대보다 크게 어둡습니다.

성서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면 대충 얼개가 보입니다.

우선 영화속 장소는 어떻게 보더라도 구약성서 속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천지창조의 신화를 공유하는 전혀 다른 별을 다룬 SF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신비한 광물을 채취하고 불을 피우는 방식 또한 마술적입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대낮에도 하늘엔 별이 빛나고 있기도 합니다.

극중 노아가 천지창조의 과정을 자녀들에게 설명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요약해서 그대로 읽어줍니다.

하지만 그때 흐르는 화면은 빅뱅이론에 의한 우주의 탄생과 진화론에 의한 생명의 탄생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성경의 설정을 빌려와 자신만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기록적으로 오래 살았던 노아는 성경에서 600세가 되던 해에 홍수를 맞지만, 영화에서는 이 시간을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크게 단축시킵니다.

짧은 시간에 모든 생물들이 탈 수 있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설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watcher”라는 존재입니다.

타락천사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영화속 노아는 성경속 인물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방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설정은 노아의 자녀들에 관한 것입니다.

노아에겐 셈,함,야벳이란 세 아들이 있었고 성경에선 그들 모두 아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셈에게만 여자가 있습니다.

야벳은 아직 어린 아이로 그려지니 성인이면서 짝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인물은 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의 결이 생깁니다.

성경 최초의 살인사건의 주인공인 카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영화 노아에선 이 이야기의 원형이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합니다.

극중 함은 형 셈이 짝을 갖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부러워하지요.

그리하여 함은 자신이 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아버지 노아를 위태롭게 할 선택을 합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재판이 되려는 셈이지요.

창조주는 아담의 원죄와 카인의 후예들로 인해 더럽혀진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 하는데 정작 생명의 방주 안에서는 이런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첫번째 아이러니입니다.

대홍수가 벌어진 이후도 살펴보지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동물들은 모두 쌍을 이루어 방주에 탑승합니다.

이들은 모종의 약으로 인해 모두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방주 속 생물들을 제외한 모든 목숨들이 멸절되는 상황.

이 상황에서 방주 안쪽은 생명을 담보하는 절대공간이지만 영화속에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잠들어 있는데 이는 마치 죽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방주 안쪽은 어둡고 음침하게 그려지는데 이로 인해 노아 일가족은 생명선에 탔다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바깥으로부터 애타게 구원을 호소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아비규환이 계속해서 노아의 가족들을 괴롭힙니다.

방주는 살아남은 자의 지옥과도 같은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두번째 아이러니입니다.

노아는 이런 상황을 인간의 멸절을 암시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손으로 갓 태어난 손녀들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얼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는 상황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들에게 겨눈 칼을 거둡니다.

영화에서 노아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뜻에 따라(창조주의 뜻에 반해!) 손녀들에게 겨눈 칼을 거둡니다. 

세번째 아이러니입니다.

극 초반 노아는 우리가 알고 있던대로의 의인입니다.

하지만 중반을 지나치며 노아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은 광기입니다.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분열증적인 인물을 그리는데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허물어져 혼돈을 겪고 있는 인물들을 꾸준히 그리고 있습니다.

노아는 스스로가 말하는 “정의”와 “인간애” 사이에서 급격하게 허물어져 갑니다.

이처럼 성경속의 설정들을 빌려와 철저히 뒤집어가며 “인간”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시도합니다.

무엇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함일 터입니다.

성공적이진 않아 보입니다.

자신이 벌려놓은 이야기를 주체못해 어정쩡하게 마무리짓는 것이 보입니다.

물론 거대 자본을 이런 이야기에 쏟아 부은 제작사의 입김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장대한 스케일로 이토록 묵직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점은 무척 부럽습니다.

함은 결국 가족을 떠나 카인의 후예처럼 살게 될 것이고, 노아는 “정의”를 버리고 “인간애”를 택하여 손녀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선 무심한 듯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끝없이 펼쳐집니다.

영화관에서 당신이 가지고 나올 감정이 무엇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리 쉽게 이 이야기를 무슨 색깔로 단정짓지는 못하리란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교계로부터의 불필요한 논쟁이 붙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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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장 마크 발레

아카데미에서 남우 주연상과 조연상을 싹쓸이한 영화입니다. 매튜 매커너히는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자레드 레토와 더불어 짧은 영상에서도 시선을 붙잡아두는 존재감에 이건 꼭 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습니다. 감독 장 마크 발레의 이름은 제겐 무척 생소합니다. AIDS에 관한 얘기가 될 것이라는 정도만 알고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론 우드루프라는 실존인물의 삶 중에서 AIDS에 걸리고 난 후 몇 년간의 시간을 따라 진행됩니다. 미국 남부 태생으로 로데오 경기를 즐기고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던 전기기술자 론 우드루프는 어느날 HIV 양성반응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더 암울한 것은 자신에게 허락된 날이 3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FDA 임상실험중이던 AZT라는 약은 부작용이 매우 심해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우드루프는 FDA의 승인을 받지 못한 약들을 멕시코에서 밀수입해서 AIDS 환자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병원, 정부와의 싸움도 해나가게 됩니다.
 플롯은 잔가지를 치지 않고 단선적으로 흐르기에 비교적 단순한 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란 사실 몇 줄의 줄거리 요약에서도 대충 짐작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작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다다른 자가 삶에의 의지를 불태우며 고군분투하는 이미지가 떠오를텐데 영리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 방향이 살짝 비틀려 있습니다. 가장 묵직한 감동을 전해주는 순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연대하게 된 “사람들”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영화 초반 감독은 주인공 우드루프가 얼마나 끔찍한 호모포빅인지를 공들여 설정합니다. AIDS라는 질병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무렵에 호모포비아 광풍이 세계를 휩쓸었던 기억을 강하게 환기시킵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동성애자에게 내리는 천형이라는 수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AIDS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던 동성애자를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작용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주인공이 덜컥 AIDS에 걸려버립니다. 급속도로 자신이 속했던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하고 철저하게 소외되었음에도 여전히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던 주인공은  트랜스젠더이기까지 한 레이언을 만나며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 과정은 충분히 예상가능함에도 여전히 감동적으로 다루어집니다. 물론 많은 부분은 우드루프 역을 맡은 매튜 매커너히와 레이언 역을 맡은 자레드 레토의 연기 덕분입니다.
두 배우가 연기하는 장면들만을 보는것 만으로도 이 영화 관람은 충분한 가치를 가집니다.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 어느 여배우보다 더 예쁘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의 클로즈업씬들은 좋은 배우가 가져야 할 얼굴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호흡도 잘 맞아서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장면들은 결코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돋보입니다.
주인공 우드루프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흡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닮았습니다.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그랜토리노”이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역시 어른거립니다. 보수적이고 고집센 마초 남자들(심지어 그들에겐 항상 여자친구나 부인이 없습니다)이 자신이 경멸하거나 무관심했던 대상과 엮이게 되고 세상을 읽는 방식이 유연해지는 식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계기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단순히 호모포빅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인다는 것보다 좀 더 확장된 의미가 다가옵니다.
혐오라는 감정은 대상에 대한 몰이해 혹은 이해하기를 거부하려는 감정일 것입니다. 영화속 두 인물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에 대한 강한 공포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중요하게 보여줍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란 결국 삶에 대한 애착의 이면이겠죠. 그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느슨한 연대의식이 싹틉니다. 극 중반 마트에서 장을 보던 우드루프가 옛 동료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레이언을 보자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 옛 동료를 완력으로 제압해 기어코 악수를 시키고 맙니다. 이 장면은 주인공이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했다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생겨납니다. 이런 휴머니티는 이해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먼저 느끼는 온기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명제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기란 어렵습니다. 영화는 다시 한 번 이 명제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죽는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서로에게 그토록 잔인해 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
거대 제약회사, 병원, FDA로 대표되는 정부 관리 등 큰 권력과의 싸움도 다뤄집니다만 딱히 크게 비중을 두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쓸데없이 감정을 소비하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데  분노의 대상이 절대악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러한 싸움을 거치며 주인공이 심적 변화를 겪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저는 이 방법이 매우 맘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감정선이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고 차분히 축적되어 갑니다. 담담하게 슬프지만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일부 관객에게는 이 담담함이 무료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요.
시작과 수미상응하는 듯한 영화의 마치는 방식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퇴장도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의 두 인물은 결국 모두 죽음을 맞게 됩니다만 카메라는 직접적으로 비추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빈 병실로 표현되고 다른 사람은 자막으로 처리됩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렇듯 부고를 통해서이겠지요. 눈물샘을 자극하려 작정한 신파극에서처럼이 아니라 말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규정한다면 이러한 방식은 윤리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여, 다시 말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루 하루 죽음에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는 태도란 곧 내 삶의 형상일 것이란 이 말은 그 자체로 또하나의 두려움일지 모르겠습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장 마크 발레

아카데미에서 남우 주연상과 조연상을 싹쓸이한 영화입니다. 매튜 매커너히는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자레드 레토와 더불어 짧은 영상에서도 시선을 붙잡아두는 존재감에 이건 꼭 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습니다. 감독 장 마크 발레의 이름은 제겐 무척 생소합니다. AIDS에 관한 얘기가 될 것이라는 정도만 알고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론 우드루프라는 실존인물의 삶 중에서 AIDS에 걸리고 난 후 몇 년간의 시간을 따라 진행됩니다. 미국 남부 태생으로 로데오 경기를 즐기고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던 전기기술자 론 우드루프는 어느날 HIV 양성반응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더 암울한 것은 자신에게 허락된 날이 3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FDA 임상실험중이던 AZT라는 약은 부작용이 매우 심해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우드루프는 FDA의 승인을 받지 못한 약들을 멕시코에서 밀수입해서 AIDS 환자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병원, 정부와의 싸움도 해나가게 됩니다.

 플롯은 잔가지를 치지 않고 단선적으로 흐르기에 비교적 단순한 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란 사실 몇 줄의 줄거리 요약에서도 대충 짐작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작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다다른 자가 삶에의 의지를 불태우며 고군분투하는 이미지가 떠오를텐데 영리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 방향이 살짝 비틀려 있습니다. 가장 묵직한 감동을 전해주는 순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연대하게 된 “사람들”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영화 초반 감독은 주인공 우드루프가 얼마나 끔찍한 호모포빅인지를 공들여 설정합니다. AIDS라는 질병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무렵에 호모포비아 광풍이 세계를 휩쓸었던 기억을 강하게 환기시킵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동성애자에게 내리는 천형이라는 수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AIDS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던 동성애자를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작용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주인공이 덜컥 AIDS에 걸려버립니다. 급속도로 자신이 속했던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하고 철저하게 소외되었음에도 여전히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던 주인공은  트랜스젠더이기까지 한 레이언을 만나며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 과정은 충분히 예상가능함에도 여전히 감동적으로 다루어집니다. 물론 많은 부분은 우드루프 역을 맡은 매튜 매커너히와 레이언 역을 맡은 자레드 레토의 연기 덕분입니다.

두 배우가 연기하는 장면들만을 보는것 만으로도 이 영화 관람은 충분한 가치를 가집니다.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 어느 여배우보다 더 예쁘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의 클로즈업씬들은 좋은 배우가 가져야 할 얼굴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호흡도 잘 맞아서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장면들은 결코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돋보입니다.

주인공 우드루프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흡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닮았습니다.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그랜토리노”이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역시 어른거립니다. 보수적이고 고집센 마초 남자들(심지어 그들에겐 항상 여자친구나 부인이 없습니다)이 자신이 경멸하거나 무관심했던 대상과 엮이게 되고 세상을 읽는 방식이 유연해지는 식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계기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단순히 호모포빅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인다는 것보다 좀 더 확장된 의미가 다가옵니다.

혐오라는 감정은 대상에 대한 몰이해 혹은 이해하기를 거부하려는 감정일 것입니다. 영화속 두 인물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에 대한 강한 공포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중요하게 보여줍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란 결국 삶에 대한 애착의 이면이겠죠. 그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느슨한 연대의식이 싹틉니다. 극 중반 마트에서 장을 보던 우드루프가 옛 동료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레이언을 보자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 옛 동료를 완력으로 제압해 기어코 악수를 시키고 맙니다. 이 장면은 주인공이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했다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생겨납니다. 이런 휴머니티는 이해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먼저 느끼는 온기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명제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기란 어렵습니다. 영화는 다시 한 번 이 명제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죽는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서로에게 그토록 잔인해 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

거대 제약회사, 병원, FDA로 대표되는 정부 관리 등 큰 권력과의 싸움도 다뤄집니다만 딱히 크게 비중을 두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쓸데없이 감정을 소비하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데  분노의 대상이 절대악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러한 싸움을 거치며 주인공이 심적 변화를 겪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저는 이 방법이 매우 맘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감정선이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고 차분히 축적되어 갑니다. 담담하게 슬프지만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일부 관객에게는 이 담담함이 무료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요.

시작과 수미상응하는 듯한 영화의 마치는 방식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퇴장도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의 두 인물은 결국 모두 죽음을 맞게 됩니다만 카메라는 직접적으로 비추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빈 병실로 표현되고 다른 사람은 자막으로 처리됩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렇듯 부고를 통해서이겠지요. 눈물샘을 자극하려 작정한 신파극에서처럼이 아니라 말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규정한다면 이러한 방식은 윤리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여, 다시 말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루 하루 죽음에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는 태도란 곧 내 삶의 형상일 것이란 이 말은 그 자체로 또하나의 두려움일지 모르겠습니다.

1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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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매튜 매커너히 #film #movie

아메리칸 허슬 - 데이비드 오 러셀

여러가지 이유로 한동안 극장엘 가지 못했습니다. 오스카 수상 결과가 나오고 그 힘을 받아 개봉하는 영화들 덕분에 일년중 가장 볼만한 영화들이 많은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뒤늦게 찾아보려 하니 이미 극장에서 내려진 작품들이 많더군요. 서둘러 아메리칸 허슬을 봤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첫 자막은 “Some of this actually happened” 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임을 드러내는 문장치고는 특이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사실입니다라고 할 때 방점은 “사실”이 아니라 “어떤”에 찍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 문장이 David O. Russell 감독의 영화세계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짐작케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러셀 감독의 영화에서 역시 볼만한 건 잘 빚어진 캐릭터들입니다. 전작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미친” 캐릭터를 가장 잘 그려내는 감독인듯 합니다. 그가 창조해내는 캐릭터들은 죄다 반쯤 나사가 풀린 상태입니다. 그가 만드는 영화에서 극적 긴장은 대개 이런 정신 나간 인물들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서 비롯합니다. 아메리칸 허슬에서는 크리스챤 베일, 에이미 애덤스,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 4인방이 말그대로 난장판을 벌입니다. 그중에서도 제니퍼 로렌스는 가장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입니다. 광기 어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씬들을 모두 잡아먹는군요. 정반대편의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네 명의 주요 배우들은 마음껏 자기 기량을 뽐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껏 망가질 각오가 되어 있는 배우라면 러셀 감독이 마련해 주는 자리는 최고의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기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치밀한 두뇌싸움을 바탕으로 한 매끈한 케이퍼 무비의 형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대극과 사기극을 잘 버무렸으니 “스팅”이 떠오를 법도 합니다. 여기에 내내 웃으며 볼 수 있도록 유머가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장르 영화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이 영화에는 잘 만들어진 사기극에서 등장하는 트릭들이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치밀한 사기 기술이나 반전이 아니라 상황속에 던져진 캐릭터들 그 자체입니다. 보통의 사기극에서 캐릭터들이 플롯에 종속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반대로 플롯이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위해 복무합니다. 나레이션은 특정 인물만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주요 인물들이 나레이션을 사용하는데 이는 얼핏 시점을 분산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사용하는 나레이션은 한 인물이 말했어도 내용이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말인즉슨 서로 다른 시점으로 이야기하면서 “차이”가 부각되는게 아니라 “공통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면서 영화의 키워드는 결국 “사기”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누군가를 속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속고 속이는 난장판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누군가를 다시 속여야 합니다. 우스운 대비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속이는 자들은 “사기꾼”이지만 남을 위해 부정한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속이는 자들은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사를 위해 이 사기극에 가담했던 수사관의 변모는 가장 극적입니다. 브래들리 쿠퍼가 변해가는 과정은 그가 입는 옷과 자신의 상관에 대한 태도로 표현되는데 가장 재미있는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그의 상관으로는 루이가 깜짝 출연합니다.)
공통점을 이루는 다른 한 요소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민폐를 끼치는 부류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 자신뿐 아니라 애꿎은 주변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지요.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초반에는 주변 사람들이 입는 피해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변화는 중반 어빙(크리스찬 베일)의 아내 제니퍼 로렌스가 등장하면서입니다. 아내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고서야 자신으로 인해 피해볼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과정은 조금 도식적으로 느껴집니다. 극 중반까지 이어오던 톤이 좀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욕망이 일정정도 이성의 기능을 상실케 한 사람들의 혼돈 속에서 꺼낸 이야기가 상투적인 윤리관이라니 용두사미 격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영화도 그렇고 데이비드 러셀 감독은 놀랍도록 참신한 창의성에 비해 이야기를 끝내는 방식이 서툴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에 쓰인 음악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듀크 엘링턴의 Jeep’s Blues를 비롯해 딜라일라, Live and Let Die 같은 음악들이 주요하게 사용되는데 그 방식이 굉장히 긴밀합니다. 음악들은 씬의 전환 즉 새로운 씬의 시작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마치 책에서 챕터의 소제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그냥 함축해서 들려주는 방식인 겁니다. 가사나 제목 뿐 아니라 아티스트에 대한 내용까지 메타적으로 폭넓게 의미를 가져다 씁니다. 역시 제니퍼 로렌스가 등장하는 전후의 음악들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삶이란 누군가를 속여서  live and let die (너죽고 나살자) 하는 것이라는 듯 말입니다.
최근의 미국영화는 확실히 거대하게는 하나의 맥락을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좋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물적, 정신적 토대는 확고해 보입니다.

아메리칸 허슬 - 데이비드 오 러셀

여러가지 이유로 한동안 극장엘 가지 못했습니다. 오스카 수상 결과가 나오고 그 힘을 받아 개봉하는 영화들 덕분에 일년중 가장 볼만한 영화들이 많은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뒤늦게 찾아보려 하니 이미 극장에서 내려진 작품들이 많더군요. 서둘러 아메리칸 허슬을 봤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첫 자막은 “Some of this actually happened” 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임을 드러내는 문장치고는 특이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사실입니다라고 할 때 방점은 “사실”이 아니라 “어떤”에 찍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 문장이 David O. Russell 감독의 영화세계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짐작케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러셀 감독의 영화에서 역시 볼만한 건 잘 빚어진 캐릭터들입니다. 전작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미친” 캐릭터를 가장 잘 그려내는 감독인듯 합니다. 그가 창조해내는 캐릭터들은 죄다 반쯤 나사가 풀린 상태입니다. 그가 만드는 영화에서 극적 긴장은 대개 이런 정신 나간 인물들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서 비롯합니다. 아메리칸 허슬에서는 크리스챤 베일, 에이미 애덤스,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 4인방이 말그대로 난장판을 벌입니다. 그중에서도 제니퍼 로렌스는 가장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입니다. 광기 어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씬들을 모두 잡아먹는군요. 정반대편의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네 명의 주요 배우들은 마음껏 자기 기량을 뽐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껏 망가질 각오가 되어 있는 배우라면 러셀 감독이 마련해 주는 자리는 최고의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기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치밀한 두뇌싸움을 바탕으로 한 매끈한 케이퍼 무비의 형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대극과 사기극을 잘 버무렸으니 “스팅”이 떠오를 법도 합니다. 여기에 내내 웃으며 볼 수 있도록 유머가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장르 영화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이 영화에는 잘 만들어진 사기극에서 등장하는 트릭들이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치밀한 사기 기술이나 반전이 아니라 상황속에 던져진 캐릭터들 그 자체입니다. 보통의 사기극에서 캐릭터들이 플롯에 종속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반대로 플롯이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위해 복무합니다. 나레이션은 특정 인물만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주요 인물들이 나레이션을 사용하는데 이는 얼핏 시점을 분산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사용하는 나레이션은 한 인물이 말했어도 내용이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말인즉슨 서로 다른 시점으로 이야기하면서 “차이”가 부각되는게 아니라 “공통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면서 영화의 키워드는 결국 “사기”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누군가를 속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속고 속이는 난장판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누군가를 다시 속여야 합니다. 우스운 대비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속이는 자들은 “사기꾼”이지만 남을 위해 부정한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속이는 자들은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사를 위해 이 사기극에 가담했던 수사관의 변모는 가장 극적입니다. 브래들리 쿠퍼가 변해가는 과정은 그가 입는 옷과 자신의 상관에 대한 태도로 표현되는데 가장 재미있는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그의 상관으로는 루이가 깜짝 출연합니다.)

공통점을 이루는 다른 한 요소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민폐를 끼치는 부류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 자신뿐 아니라 애꿎은 주변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지요.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초반에는 주변 사람들이 입는 피해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변화는 중반 어빙(크리스찬 베일)의 아내 제니퍼 로렌스가 등장하면서입니다. 아내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고서야 자신으로 인해 피해볼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과정은 조금 도식적으로 느껴집니다. 극 중반까지 이어오던 톤이 좀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욕망이 일정정도 이성의 기능을 상실케 한 사람들의 혼돈 속에서 꺼낸 이야기가 상투적인 윤리관이라니 용두사미 격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영화도 그렇고 데이비드 러셀 감독은 놀랍도록 참신한 창의성에 비해 이야기를 끝내는 방식이 서툴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에 쓰인 음악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듀크 엘링턴의 Jeep’s Blues를 비롯해 딜라일라, Live and Let Die 같은 음악들이 주요하게 사용되는데 그 방식이 굉장히 긴밀합니다. 음악들은 씬의 전환 즉 새로운 씬의 시작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마치 책에서 챕터의 소제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그냥 함축해서 들려주는 방식인 겁니다. 가사나 제목 뿐 아니라 아티스트에 대한 내용까지 메타적으로 폭넓게 의미를 가져다 씁니다. 역시 제니퍼 로렌스가 등장하는 전후의 음악들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삶이란 누군가를 속여서  live and let die (너죽고 나살자) 하는 것이라는 듯 말입니다.

최근의 미국영화는 확실히 거대하게는 하나의 맥락을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좋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물적, 정신적 토대는 확고해 보입니다.

1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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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담

천명관의 화제작 “고래”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작가는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 싶어하는 요소가 결국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 인용해 봅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청춘이라는 시간이 미래를 준비하는 용도로써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있으며 중요하다는 뜻으로 실패담을 성장통과 구분하여 이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훌륭한 서사는 실패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찰이 제 힘을 갖는 것은 상승이 아니라 전락의 순간일 가능성이 높아보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되는 실패의 숭고한 여정에 대한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보고 난 후로 “실패”란 단어가 자주 눈에 밟힙니다.

황현산 선생의 글은 그 자체로 위로이기도 하고 채찍이기도 합니다.

실패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제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될 테니 말입니다.

몇 시간 후면 월요일 아침이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군요.

1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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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 아쉬가르 파라디기어코 찾아서 봤습니다. 천성이 게으름에도 이토록 바지런을 떤 것은 다름아닌 감독의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힘입니다.드물게도 영화를 보고나면 감독이 쓴 글을 찾아보고 싶게 만듭니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좋은 감독이기 이전에 훌륭한 문장가인듯 합니다.영화 제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영화의 원제는 Le passé입니다. 영어제목은 The Past로 불어의 원래 의미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반면 번안된 우리나라에서의 제목은 아무래도 원제와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영화를 보기 전에 전 이 제목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의미가 알쏭달쏭하면서도 들으면 쉬 잊히지 않더군요.원제와의 거리감때문에 저항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나쁘지 않은 번안이라고 생각합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제는 감독이 힘을 빼고 싶었던 감정이 묻어 있다면 우리 제목은 좀 요란하다는 정도겠군요.영화는 미스터리의 작법을 따르는 드라마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따라 조금씩 진실이 드러나는데 그 방식은 항상 앞 씬에서의 대화를 배반하는 형태입니다.이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방식 그대로입니다.이 영화에서의 대화 씬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작은 세계처럼 보입니다.하지만 다음 씬에서 앞서의 대화는 상당 부분 부정당합니다. 주요한 캐릭터와 이야기의 토대가 무르익은 중반부터 내내 영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앞에 말하여진 사실이 다른 이와의 대화를 통해 부정당하는 형식으로 말입니다.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더 많은 파편적인 사실에 노출되지만 여전히 진실은 오리무중입니다.비극이 잉태되는 곳에는 관계맺기에 조금 서툴렀던 주인공들의 사소할 수 있었던 오해들만 있을 뿐입니다.선의로 점철된 비극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던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의 주인공들보다는 좀 더 결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쌓아올려져 빚어낸 총합으로서의 비극적 결과는 모두가 감당하기 힘든 그림자를 드리웁니다.시작은 모두 작은 인정투쟁입니다.극중의 등장인물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조리 관계를 갈구합니다.하지만 관계 맺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습니다.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대화”로부터 시작하고 거의 대부분의 씬은 두 사람간의 “대화”로 이루어집니다.문제는 사건에 관한 당사자간 대화는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딸은 엄마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아빠에게만 합니다. 남편은 진실을 듣기 위해 아내와 얘기해야 하지만 아내는 혼수상태입니다.아이는 아빠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아저씨와 합니다.가 닿지 못하는 진심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약한 고리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저도 모르게 비극의 불씨가 됩니다.4년전에 했어야 할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맙니다.등장인물들은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필요한 만큼은 아닙니다.영화의 시작이 이 이상한 대화의 단절을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남자 주인공 아마드가 파리 공항에 도착합니다.마중을 나온 여자 주인공 마리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저쪽에 있습니다.두 사람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눕니다.재미있는 것은 이들을 비추는 방식입니다.카메라는 늘 대화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에 와 있습니다.따라서 관객도 등장인물과 똑같이 유리벽에 가로막혀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합니다.상대방이 열심히 유리벽 너머에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다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끝내 첫 씬에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넘어가게 됩니다.이 장면은 영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결국 나의 말은 너에게 가닿지 못하리라 하는.연기자들이 고르게 호연합니다.미쟝센도 훌륭합니다. 연기자의 동선을 포함해서 화면을 구성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음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거대한 악의나 불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면 별로 고민이 없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어느 쪽이 이겨도 가슴만 아플 뿐이라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어디 있을까요.아쉬가르 파라디는 그 먹먹함을 들여다 보라고 조용히 손을 건넵니다.비록 꽉 쥐어주는 상대가 없을지라도 그 손을 빼지 않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 채로 말입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 아쉬가르 파라디

기어코 찾아서 봤습니다. 천성이 게으름에도 이토록 바지런을 떤 것은 다름아닌 감독의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힘입니다.
드물게도 영화를 보고나면 감독이 쓴 글을 찾아보고 싶게 만듭니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좋은 감독이기 이전에 훌륭한 문장가인듯 합니다.

영화 제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Le passé입니다. 영어제목은 The Past로 불어의 원래 의미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번안된 우리나라에서의 제목은 아무래도 원제와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전 이 제목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의미가 알쏭달쏭하면서도 들으면 쉬 잊히지 않더군요.
원제와의 거리감때문에 저항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나쁘지 않은 번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제는 감독이 힘을 빼고 싶었던 감정이 묻어 있다면 우리 제목은 좀 요란하다는 정도겠군요.

영화는 미스터리의 작법을 따르는 드라마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따라 조금씩 진실이 드러나는데 그 방식은 항상 앞 씬에서의 대화를 배반하는 형태입니다.
이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방식 그대로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대화 씬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작은 세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 씬에서 앞서의 대화는 상당 부분 부정당합니다.
주요한 캐릭터와 이야기의 토대가 무르익은 중반부터 내내 영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앞에 말하여진 사실이 다른 이와의 대화를 통해 부정당하는 형식으로 말입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더 많은 파편적인 사실에 노출되지만 여전히 진실은 오리무중입니다.
비극이 잉태되는 곳에는 관계맺기에 조금 서툴렀던 주인공들의 사소할 수 있었던 오해들만 있을 뿐입니다.
선의로 점철된 비극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던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의 주인공들보다는 좀 더 결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쌓아올려져 빚어낸 총합으로서의 비극적 결과는 모두가 감당하기 힘든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시작은 모두 작은 인정투쟁입니다.
극중의 등장인물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조리 관계를 갈구합니다.
하지만 관계 맺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습니다.
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대화”로부터 시작하고 거의 대부분의 씬은 두 사람간의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사건에 관한 당사자간 대화는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딸은 엄마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아빠에게만 합니다.
남편은 진실을 듣기 위해 아내와 얘기해야 하지만 아내는 혼수상태입니다.
아이는 아빠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아저씨와 합니다.
가 닿지 못하는 진심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약한 고리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저도 모르게 비극의 불씨가 됩니다.
4년전에 했어야 할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맙니다.
등장인물들은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필요한 만큼은 아닙니다.
영화의 시작이 이 이상한 대화의 단절을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아마드가 파리 공항에 도착합니다.
마중을 나온 여자 주인공 마리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저쪽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을 비추는 방식입니다.
카메라는 늘 대화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에 와 있습니다.
따라서 관객도 등장인물과 똑같이 유리벽에 가로막혀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열심히 유리벽 너머에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다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끝내 첫 씬에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 장면은 영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나의 말은 너에게 가닿지 못하리라 하는.


연기자들이 고르게 호연합니다.
미쟝센도 훌륭합니다. 연기자의 동선을 포함해서 화면을 구성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음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대한 악의나 불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면 별로 고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이겨도 가슴만 아플 뿐이라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어디 있을까요.
아쉬가르 파라디는 그 먹먹함을 들여다 보라고 조용히 손을 건넵니다.
비록 꽉 쥐어주는 상대가 없을지라도 그 손을 빼지 않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 채로 말입니다.

1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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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m #movie #영화 #아쉬가르 파라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인사이드 르윈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코엔 형제의 영화는 좋거나 아주 좋습니다. 그들의 첫 음악 영화 &lt;인사이드 르윈&gt;은 아주 좋은 쪽에 속합니다. 제겐 코엔 영화의 이전 작품들 중에서는 &lt;시리어스 맨&gt;과 가장 비슷해 보입니다.
이제 좀 이해할 수 있겠다 싶으면 한발짝씩 앞서가는 그들의 영화를 보는 것은 그래서 추적에 가깝습니다. &lt;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gt; 이후의 행보는 더욱 놀라운데 종종 데뷔초의 재기와 총기를 잃곤 하는 많은 감독들과 달리 점점 더 걸작의 빈도가 잦아지는 그들의 필모는 가속팽창하는 우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영화의 영어 원제는 &lt;Inside Llewyn Davis&gt; 인데 이는 주인공의 극중 솔로 앨범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말그대로 르윈 데이비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Dave Van Ronk라는 실존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듯 코엔 형제의 손을 거쳐 원작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향기를 흠뻑 내뿜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거의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방점은 “거의”에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반복과 차이에서 의미를 길어올립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르윈은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무대에서 같은 레파토리로 노래를 부르고 똑같이 얻어맞지만 시작할 때 우리가 봤던 그와는 아주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일주일간의 르윈의 여정은 이 작은 변화를 위한 안내서입니다. 
뉴욕의 무명 포크가수 르윈 데이비스는 한 겨울 외투를 사입을 돈도 없고 주거할 곳도 없어 남의 집 소파를 전전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헤어진 여친을 임신시키기도 해서 낙태비용도 마련해야 합니다.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전에 사귀었던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책임감도 없는 찌질함의 표본입니다. 자신을 재워준 교수의 고양이를 얼떨결에 맡게 되는데 심지어 이 고양이마저 잃어버립니다. 주변 사람들 모두 한심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인물이죠. 영화는 이러한 르윈 데이비스의 일주일을 따라갑니다.
먼저 고양이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극중 고양이는 다양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 고양이 자체가 험난한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 교수의 고양이는 열린 창문을 통해 도망을 갑니다.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발견하고 데려오지만 알고보니 닮은 다른 고양이입니다. (심지어 성별도 다르지요.)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또다른 고양이는 자동차로 치고 맙니다. 다시 교수의 집에 가보니 잃어버렸던 고양이는 제 발로 집을 찾아왔습니다. 나중에야 밝혀지는 고양이의 이름은 무려 “율리시스”입니다. 현학적이지만 험난한 여정을 거쳐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의 이름으로는 딱이지요. 
이 고양이들은 모두 각 시점에서의 르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교수의 집에서 뛰쳐나온 고양이처럼 르윈은 고단한 길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르윈이 암놈을 수놈으로 오인한 것처럼 존 굿맨은 끝끝내 르윈을 오인하고, 자동차에 내버려둔 고양이는 뉴욕에서의 삶을 끝내고 시카고에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영화에서 고양이는 도식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징후적으로 느껴야 하는 대상에 가깝습니다. 감정 혹은 상태의 현현이라고 할까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밤길에 졸음을 참아가며 운전하던 르윈은 예전 여자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지 않고 낳아 키우고 있는 애크런 마을을 지나칩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그 마을에 들를지 고민하는 모습을 잠시 비추지만 끝내 그는 핸들을 꺾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씬에서 졸음을 참으며 운전하던 그는 잠시의 부주의로 고양이를 치고 맙니다. 실루엣으로도 부상을 입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고양이는 절룩이며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자동차 범퍼에 묻은 작은 핏자국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숏은 이를 바라보는 르윈의 표정입니다. 여기서 고양이는 당장 애크런 마을의 전 여자친구와 아이를 떠올리게도 하고, 곧 낙태수술을 행할 또다른 여자친구를 나타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의 연상의 공통된 감정은 책임감이겠지요. 이렇게 쌓아올려진 감정의 변화는 르윈이 뉴욕으로 돌아와 하게 되는 선택에 직접적 영향을 줍니다.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표현력이 있다면 이런 방식일 것입니다.
코엔의 영화에서 늘 그러했듯 주인공의 선택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 냅니다. 그들의 영화를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아이러니”일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게 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르윈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화 전반부에 르윈은 “속물”처럼 살고 싶지 않아 음악을 열심히 하지만 돌아오는 삶은 “루저”의 그것입니다. 지칠대로 지친 그가 후반부에 이르러 드디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려 하는 순간 삶은 다시 그를 무대로 내던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무대는 그렇게 길고 긴 길을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 그의 인생의 한 스냅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르윈은 조금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성공할 기미는 없고, 그렇다고 딱히 나을 것도 없어보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도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르윈은 계속 노래할 것이고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찰은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어떠한가요? 희박하기 그지없는 가능성의 성공담을 미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루저로 만들기 일쑤이거나, 값싼 위로로 삶을 더 부박하게 만들곤 한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넘쳐나는 자기 계발서나 오디션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나의 내일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지라도 다리위에서 뛰어내리거나 약물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조용히 뇌까리는 이 영화는 유난히 반짝거립니다. 
삶은 반복됩니다. 이 반복의 끝에 “트로이”가 기다리고 있는지 “밥 딜런”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해도. 
배우들 모두 출중한 노래 솜씨를 뽐냅니다. 하지만 극중 르윈은 “포크가 거기서 거기죠”라고 말하지요. 영화에 쓰인 음악들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영상과 만나면서 완전체를 이룹니다. 정교하게 가사와 영상의 매칭이 이뤄지고 이에 따라 화학작용도 풍부하게 발생합니다. 노래가 나오는 순간들은 모두 최상의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혹 누군가 문학이 전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왜 그리 많은 돈을 들여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질문한다면 전 이 영화를 보여주겠습니다.  

인사이드 르윈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코엔 형제의 영화는 좋거나 아주 좋습니다. 그들의 첫 음악 영화 <인사이드 르윈>은 아주 좋은 쪽에 속합니다. 제겐 코엔 영화의 이전 작품들 중에서는 <시리어스 맨>과 가장 비슷해 보입니다.

이제 좀 이해할 수 있겠다 싶으면 한발짝씩 앞서가는 그들의 영화를 보는 것은 그래서 추적에 가깝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의 행보는 더욱 놀라운데 종종 데뷔초의 재기와 총기를 잃곤 하는 많은 감독들과 달리 점점 더 걸작의 빈도가 잦아지는 그들의 필모는 가속팽창하는 우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영화의 영어 원제는 <Inside Llewyn Davis> 인데 이는 주인공의 극중 솔로 앨범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말그대로 르윈 데이비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Dave Van Ronk라는 실존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듯 코엔 형제의 손을 거쳐 원작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향기를 흠뻑 내뿜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거의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방점은 “거의”에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반복과 차이에서 의미를 길어올립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르윈은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무대에서 같은 레파토리로 노래를 부르고 똑같이 얻어맞지만 시작할 때 우리가 봤던 그와는 아주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일주일간의 르윈의 여정은 이 작은 변화를 위한 안내서입니다. 

뉴욕의 무명 포크가수 르윈 데이비스는 한 겨울 외투를 사입을 돈도 없고 주거할 곳도 없어 남의 집 소파를 전전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헤어진 여친을 임신시키기도 해서 낙태비용도 마련해야 합니다.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전에 사귀었던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책임감도 없는 찌질함의 표본입니다. 자신을 재워준 교수의 고양이를 얼떨결에 맡게 되는데 심지어 이 고양이마저 잃어버립니다. 주변 사람들 모두 한심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인물이죠. 영화는 이러한 르윈 데이비스의 일주일을 따라갑니다.

먼저 고양이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극중 고양이는 다양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 고양이 자체가 험난한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 교수의 고양이는 열린 창문을 통해 도망을 갑니다.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발견하고 데려오지만 알고보니 닮은 다른 고양이입니다. (심지어 성별도 다르지요.)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또다른 고양이는 자동차로 치고 맙니다. 다시 교수의 집에 가보니 잃어버렸던 고양이는 제 발로 집을 찾아왔습니다. 나중에야 밝혀지는 고양이의 이름은 무려 “율리시스”입니다. 현학적이지만 험난한 여정을 거쳐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의 이름으로는 딱이지요. 

이 고양이들은 모두 각 시점에서의 르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교수의 집에서 뛰쳐나온 고양이처럼 르윈은 고단한 길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르윈이 암놈을 수놈으로 오인한 것처럼 존 굿맨은 끝끝내 르윈을 오인하고, 자동차에 내버려둔 고양이는 뉴욕에서의 삶을 끝내고 시카고에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영화에서 고양이는 도식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징후적으로 느껴야 하는 대상에 가깝습니다. 감정 혹은 상태의 현현이라고 할까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밤길에 졸음을 참아가며 운전하던 르윈은 예전 여자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지 않고 낳아 키우고 있는 애크런 마을을 지나칩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그 마을에 들를지 고민하는 모습을 잠시 비추지만 끝내 그는 핸들을 꺾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씬에서 졸음을 참으며 운전하던 그는 잠시의 부주의로 고양이를 치고 맙니다. 실루엣으로도 부상을 입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고양이는 절룩이며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자동차 범퍼에 묻은 작은 핏자국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숏은 이를 바라보는 르윈의 표정입니다. 여기서 고양이는 당장 애크런 마을의 전 여자친구와 아이를 떠올리게도 하고, 곧 낙태수술을 행할 또다른 여자친구를 나타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의 연상의 공통된 감정은 책임감이겠지요. 이렇게 쌓아올려진 감정의 변화는 르윈이 뉴욕으로 돌아와 하게 되는 선택에 직접적 영향을 줍니다.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표현력이 있다면 이런 방식일 것입니다.

코엔의 영화에서 늘 그러했듯 주인공의 선택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 냅니다. 그들의 영화를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아이러니”일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게 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르윈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화 전반부에 르윈은 “속물”처럼 살고 싶지 않아 음악을 열심히 하지만 돌아오는 삶은 “루저”의 그것입니다. 지칠대로 지친 그가 후반부에 이르러 드디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려 하는 순간 삶은 다시 그를 무대로 내던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무대는 그렇게 길고 긴 길을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 그의 인생의 한 스냅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르윈은 조금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성공할 기미는 없고, 그렇다고 딱히 나을 것도 없어보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도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르윈은 계속 노래할 것이고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찰은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어떠한가요? 희박하기 그지없는 가능성의 성공담을 미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루저로 만들기 일쑤이거나, 값싼 위로로 삶을 더 부박하게 만들곤 한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넘쳐나는 자기 계발서나 오디션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나의 내일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지라도 다리위에서 뛰어내리거나 약물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조용히 뇌까리는 이 영화는 유난히 반짝거립니다. 

삶은 반복됩니다. 이 반복의 끝에 “트로이”가 기다리고 있는지 “밥 딜런”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해도. 

배우들 모두 출중한 노래 솜씨를 뽐냅니다. 하지만 극중 르윈은 “포크가 거기서 거기죠”라고 말하지요. 영화에 쓰인 음악들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영상과 만나면서 완전체를 이룹니다. 정교하게 가사와 영상의 매칭이 이뤄지고 이에 따라 화학작용도 풍부하게 발생합니다. 노래가 나오는 순간들은 모두 최상의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혹 누군가 문학이 전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왜 그리 많은 돈을 들여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질문한다면 전 이 영화를 보여주겠습니다.  

2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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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엔 형제 #영화 #film #음악

어바웃 타임 - 리차드 커티스

리차드 커티스 감독은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의 영화를 연출하거나 각본을 써서  영국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부류의 사람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이번 작품 <어바웃 타임> 역시 전형적인 워킹타이틀의 리차드 커티스 작품입니다. 

주인공  팀(돔놀 글리슨)은 21살이 되던 해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집안 대대로 전해져오는 비밀을 알게 됩니다. 바로 성인이 된 집안 남자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비밀이지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뭘 하고 싶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팀은 별다른 고민없이 사랑을 답합니다. 팀이 시간여행을 통해 사랑과 인생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 영화내내 펼쳐집니다.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잘 다룰 줄 아는 영화입니다.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유머가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초적인 자극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가학적인 코미디에 우리는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그의 영화에선 소심한 캐릭터의 지나치게 조심스런 행동이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웃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 영화에는 박장대소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지라도 꾸준히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들이 잘 스며 있습니다. 저는 그의 유머가 좋습니다.

시간 여행이란 소재는 창작자들이 즐겨 소환하는 재료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의 정서야말로 무엇보다 강력한 감정의 산물일테니까요.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시간을 되돌려 하는 일은 어찌보면 매우 사소한 것들입니다. 아버지부터가 그러합니다. 시간을 돌아가 한다는 일이 “고작” 책을 읽는 것이지요. 영화 시작하자 마자 존 르카레를 읽는 아버지의 모습이 살짝 비춰집니다. 이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주인공이 타임 리프를 이용해 노래방 시간을 늘린 것을 연상케 합니다. 시간을 돌리고 돌려서 찰스 디킨즈를 세 번 읽는 것이 아버지의 경우라면 주인공 팀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획득하기 위해 그 기회를 사용합니다. 여동생의 친구를 대상으로 한 첫 구애는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쯤 오면 벌써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분명해지게 마련이죠.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사뭇 다른 온도로 진행이 되고 말미에 가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또다시 변주를 시도합니다.

영화는 결국 현재 이 순간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제대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 봤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의 이야기 전개 방식에 있습니다. 시간여행이란 소재를 이용해 대중들에게 소구할 수 있는 플롯으로 극의 얼개를 꾸며 놓고 역시 시간여행이 줄 수 있는 교훈 한 가지를 넣어 감동을 제조해보자라는 공장장 마인드가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의 플롯이 주제를 배반하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말미에 주인공 팀은 선언합니다. 시간여행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웠다고. 이 부분에서 실소가 나옴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 팀이 이상적인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시간여행 때문이었습니다. 여동생의 삶을 나락에서 구원한 것도 역시 시간여행 덕분이고, 다소 신파스러운 아버지와의 마지막 조우 역시 시간을 거슬러 간 덕분입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는 단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꼽으라면 그건 결국 시간여행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별다른 노력없이 거부를 얻게 된 재산가가 이제 막 사회로 나서는 초년생들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충고해 주는 것을 듣는다면 비슷한 느낌일까요.

아포리즘이 그 자체로 아무리 출중할 지라도 전해지는 주체에 따라 의미없는 레토릭으로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하여 이 영화는 몇가지 미덕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농담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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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바웃 타임 #film #리차드 커티스 #워킹타이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 마틴 스콜세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여전히 꾸준한 에너지로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한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3시간에 이르는 역작입니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영화에 대해 정보를 거의 갖지 않은 채 관람했습니다. 따라서 의외로 영화 내내 코미디 형식을 띄고 있는 작풍에 적잖이 놀랐으며 끝날 때 즈음엔 대중영화치고는 제법 긴 러닝타임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디카프리오가 분한 실존인물 조던 벨포트와 주변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한 순간 혹은 시절을 담아냅니다. 그 시절이란 마약, 술, 섹스 그리고 이 모든 향락의 근원인 돈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 인물들을 지배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대충 떠오르는 플롯 구조가 있지요. 허망한 욕구에 집착하고 결국 성공하는 듯 했으나 전락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이 플롯을 별 무리없이 따르면서도 현대 사회에 대한 얕지 않은 통찰과 섬뜩한 질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칭송받아야 할 작품들이 있다고 믿습니다.)시나리오가 범상치 않습니다.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고 세부적인 에피소드들은 극 전체의 흐름과 조응하며 나아갑니다. 대사 역시 매력적입니다. 티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중의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대사들이 여러군데 포진하고 있습니다. 웃음의 포인트도 좋구요. 시종일관 유머가 끊이지 않는데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기 때문에 패턴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유효합니다. 설핏 우디 앨런이나 홍상수의 향이 어른거릴 법한 장면들도 모두 훨씬 더 희화화해서 보여줍니다. 형식면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극중극 형태를 띄기도 하고 조던 벨포트의 내레이션은 보이스 오버가 아닌 극중 인물의 입으로 들려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장치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런 장치들은 계속해서 관객을 일정 선 밖으로 밀어냅니다. 즉, 이것이 영화임을 강조하고 있는 격입니다.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이 영화의 날카로운 시선은 어느 순간 스크린밖으로 튀어나와 관객을 향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이 영화속 인물들을 마음껏 비웃는 너는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영화속 인물들은 확장되고 확장되어 결국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 혹은 그를 둘러싼 시스템 즉 세계를 의미하게 됩니다. 전락의 플롯을 따른다고 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선 실질적인 의미에서 누구 하나 쇠락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어느 누구도 각성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바뀌었을 뿐 그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았음을 마지막 두 씬에서 강렬하게 확인해 줍니다. 영화의 마지막 씬은 조던 벨포트가 대중 강연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 강연회에 참석한 관중들을 비추는 방식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관중의 얼굴을 하나 하나 클로즈업으로 잡는 마지막 장면들은 결국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상징합니다. 하여, 영화내내 지독히도 어리석었던 모든 등장인물들이 결국 나와 다르지 않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스콜세지 답지 않게 가볍게 시작한 영화는 그의 여느 영화보다 무겁게 마무리됩니다. 자본이 모든 가치를 잠식한 이 시대에 가하는 노장의 일침인 셈입니다.등장인물들의 모든 연기가 모두 훌륭합니다. 디카프리오는 살인적인 대사량을 더 잘할 수 없게 소화해냅니다. 매튜 맥커너히는 매우 짧게 등장함에도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극 초반 그의 세팅이 없었다면 영화는 훨씬 심심해졌을 것입니다. 근래에 본 스콜세지 영화 중엔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때론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있고 이 영화는 그 목록에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 마틴 스콜세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여전히 꾸준한 에너지로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한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3시간에 이르는 역작입니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영화에 대해 정보를 거의 갖지 않은 채 관람했습니다. 따라서 의외로 영화 내내 코미디 형식을 띄고 있는 작풍에 적잖이 놀랐으며 끝날 때 즈음엔 대중영화치고는 제법 긴 러닝타임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디카프리오가 분한 실존인물 조던 벨포트와 주변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한 순간 혹은 시절을 담아냅니다. 그 시절이란 마약, 술, 섹스 그리고 이 모든 향락의 근원인 돈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 인물들을 지배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대충 떠오르는 플롯 구조가 있지요. 허망한 욕구에 집착하고 결국 성공하는 듯 했으나 전락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이 플롯을 별 무리없이 따르면서도 현대 사회에 대한 얕지 않은 통찰과 섬뜩한 질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칭송받아야 할 작품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시나리오가 범상치 않습니다.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고 세부적인 에피소드들은 극 전체의 흐름과 조응하며 나아갑니다. 대사 역시 매력적입니다. 티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중의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대사들이 여러군데 포진하고 있습니다. 웃음의 포인트도 좋구요. 시종일관 유머가 끊이지 않는데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기 때문에 패턴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유효합니다. 설핏 우디 앨런이나 홍상수의 향이 어른거릴 법한 장면들도 모두 훨씬 더 희화화해서 보여줍니다.

형식면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극중극 형태를 띄기도 하고 조던 벨포트의 내레이션은 보이스 오버가 아닌 극중 인물의 입으로 들려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장치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런 장치들은 계속해서 관객을 일정 선 밖으로 밀어냅니다. 즉, 이것이 영화임을 강조하고 있는 격입니다.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이 영화의 날카로운 시선은 어느 순간 스크린밖으로 튀어나와 관객을 향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이 영화속 인물들을 마음껏 비웃는 너는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영화속 인물들은 확장되고 확장되어 결국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 혹은 그를 둘러싼 시스템 즉 세계를 의미하게 됩니다.

전락의 플롯을 따른다고 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선 실질적인 의미에서 누구 하나 쇠락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어느 누구도 각성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바뀌었을 뿐 그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았음을 마지막 두 씬에서 강렬하게 확인해 줍니다. 영화의 마지막 씬은 조던 벨포트가 대중 강연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 강연회에 참석한 관중들을 비추는 방식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관중의 얼굴을 하나 하나 클로즈업으로 잡는 마지막 장면들은 결국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상징합니다. 하여, 영화내내 지독히도 어리석었던 모든 등장인물들이 결국 나와 다르지 않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스콜세지 답지 않게 가볍게 시작한 영화는 그의 여느 영화보다 무겁게 마무리됩니다. 자본이 모든 가치를 잠식한 이 시대에 가하는 노장의 일침인 셈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모든 연기가 모두 훌륭합니다. 디카프리오는 살인적인 대사량을 더 잘할 수 없게 소화해냅니다. 매튜 맥커너히는 매우 짧게 등장함에도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극 초반 그의 세팅이 없었다면 영화는 훨씬 심심해졌을 것입니다.

근래에 본 스콜세지 영화 중엔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때론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있고 이 영화는 그 목록에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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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스콜세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film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꾸준히 &#8220;가족&#8221;이라는 문제를 깊게 천착해 왔습니다. 가족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가 가져오는 소재는 사실 매우 극단적입니다. 죽거나, 버려지거나, 헤어지거나 말입니다. 이번에는 뒤바뀐 가족을 소재로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만 6년을 키운 아들이 태어난 병원의 실수로 인해 바뀐 것을 알게 됩니다. 뒤바뀐 아이를 둔 두 가족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이런 신파적인 설정은 사실 다루기가 쉽지 않지요. 조금만 삐끗해도 사랑과 전쟁 류로 흐르기 마련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분야에 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선택은 늘 믿음직합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성장담입니다. 일본 국민 훈남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분한 료타의 성장담이 기본 줄기인 셈입니다. 그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님을 조근 조근 보여주는 방식은 어렵지 않지만 경탄스럽습니다. 그의 영화가 특별한 것은 강력한 훅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잽만으로도 관객을 K.O 시킬 수 있는 것은 그만의 능력입니다.
과잉으로 흐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그 때문에 마치 휴지가 물에 젖어들어가듯 차츰차츰 축적되는 감정은 그 무게가 무겁습니다. 그의 영화에서의 슬픔은 눈물샘보다는 폐부 깊숙한 곳을 건드리고, 감동은 입가에 머무르지 않고 오랜 시간을 획득하곤 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 거리가 생깁니다. 모성이 어느정도 천부적인 것이라면 부성은 그에 비해 좀 거리감이 있는 감정이지요. 다시 말하면 가족에서 늘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합류하기 쉽지 않는 구성원은 아버지입니다. 이 영화에서 료타가 그런 아버지이고, 료타의 아버지 역시 그런 아버지입니다. 영화제목이 의미하는 &#8220;아버지&#8221;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겉도는 존재가 깊은 고민과 계기를 통해 비로소 &#8220;가족&#8221;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내미는 것은 &#8220;시간&#8221;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세월의 흐름으로써의 시간이 아니라 공감각적인 시간, 즉 함께한 경험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경쟁을 통한 승리라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현대사회와 혈연을 중시하는 가부장제의 고리타분함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그러나 조용히 비판하는 솜씨는 유려합니다. 영화에서 이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저를 포함한 한국의 많은 아버지들은 남달리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두 가족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객은 충분히 납득이 가능합니다. 료타가 진정한 아버지가 되었기에 그 어떤 선택도 중요치 않음을. 이야기를 끝맺는 방식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생각보다 카메라가 많이 움직입니다. 다만 관객에게 크게 의식되지 않는데 이유는 상하 또는 좌우로의 패닝이 주를 이루고 그 폭도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흔한 줌도 사용되지 않으며 편집의 속도 역시 빠르지 않아 컷수가 많지 않습니다. 흔들림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는 방식인데 이 역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않고 담담하게 그리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움직이던 카메라가 앞뒤로 움직이는 순간이 딱 한 번 있는데, 그건 역시 결말에서 입니다.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물러서며 마치 관조하듯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이 때는 극장에 불이 밝혀진 후를 대비해서 눈물을 좀 닦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네. 사실 좀 창피할 정도로 많이 울긴 했습니다 -_-;
아역들의 연기 이야기를 안할수가 없네요. 도대체 이 감독은 매번 어디서 이런 아이들을 캐스팅해오는 걸까요? 아니면 그만의 아이들에 대한 연기지도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기에 이런 연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감탄하며 연기를 보게 됩니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마법같은 씬도 여럿 있습니다. 제게 특히 남은 장면은 아이 엄마가 케이타를 데리고 오는 기차안에서의 씬입니다. 그들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가 마무리되는 순간 기차가 멈추어서는데 타이밍과 미장센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인 시간의 흐름을 묘사하는 편집 역시 매번 훌륭합니다.
음악의 사용도 참 좋습니다.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메인 테마로 사용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글렌 굴드 버전으로 사용되었군요. 이 영화의 주제와 글렌 굴드의 유사점에 대해서는 씨네21의 우혜경 평론가의 흥미로운 분석도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걸어도 걸어도"에 비하면 근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나 이번 영화는 보다 대중적인 눈높이를 고려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에게 다가서는 적절한 위치를 아직까지는 잘 찾아 들어가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유사가족에서 대안을 찾는 방식은 봉준호 감독과 비교해 봐도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길 것 같습니다. &#8220;괴물&#8221;, &#8220;설국열차&#8221;등과 함께 얘기해도 되겠지요. 아니면 모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8220;마더&#8221;와 함께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꾸만 수다스럽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극장에서 돌아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는 그의 영화에서의 카메라처럼 아주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꾸준히 “가족”이라는 문제를 깊게 천착해 왔습니다. 가족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가 가져오는 소재는 사실 매우 극단적입니다. 죽거나, 버려지거나, 헤어지거나 말입니다. 이번에는 뒤바뀐 가족을 소재로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만 6년을 키운 아들이 태어난 병원의 실수로 인해 바뀐 것을 알게 됩니다. 뒤바뀐 아이를 둔 두 가족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이런 신파적인 설정은 사실 다루기가 쉽지 않지요. 조금만 삐끗해도 사랑과 전쟁 류로 흐르기 마련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분야에 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선택은 늘 믿음직합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성장담입니다. 일본 국민 훈남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분한 료타의 성장담이 기본 줄기인 셈입니다. 그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님을 조근 조근 보여주는 방식은 어렵지 않지만 경탄스럽습니다. 그의 영화가 특별한 것은 강력한 훅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잽만으로도 관객을 K.O 시킬 수 있는 것은 그만의 능력입니다.

과잉으로 흐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그 때문에 마치 휴지가 물에 젖어들어가듯 차츰차츰 축적되는 감정은 그 무게가 무겁습니다. 그의 영화에서의 슬픔은 눈물샘보다는 폐부 깊숙한 곳을 건드리고, 감동은 입가에 머무르지 않고 오랜 시간을 획득하곤 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 거리가 생깁니다. 모성이 어느정도 천부적인 것이라면 부성은 그에 비해 좀 거리감이 있는 감정이지요. 다시 말하면 가족에서 늘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합류하기 쉽지 않는 구성원은 아버지입니다. 이 영화에서 료타가 그런 아버지이고, 료타의 아버지 역시 그런 아버지입니다. 영화제목이 의미하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겉도는 존재가 깊은 고민과 계기를 통해 비로소 “가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내미는 것은 “시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세월의 흐름으로써의 시간이 아니라 공감각적인 시간, 즉 함께한 경험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경쟁을 통한 승리라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현대사회와 혈연을 중시하는 가부장제의 고리타분함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그러나 조용히 비판하는 솜씨는 유려합니다. 영화에서 이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저를 포함한 한국의 많은 아버지들은 남달리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두 가족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객은 충분히 납득이 가능합니다. 료타가 진정한 아버지가 되었기에 그 어떤 선택도 중요치 않음을. 이야기를 끝맺는 방식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생각보다 카메라가 많이 움직입니다. 다만 관객에게 크게 의식되지 않는데 이유는 상하 또는 좌우로의 패닝이 주를 이루고 그 폭도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흔한 줌도 사용되지 않으며 편집의 속도 역시 빠르지 않아 컷수가 많지 않습니다. 흔들림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는 방식인데 이 역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않고 담담하게 그리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움직이던 카메라가 앞뒤로 움직이는 순간이 딱 한 번 있는데, 그건 역시 결말에서 입니다.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물러서며 마치 관조하듯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이 때는 극장에 불이 밝혀진 후를 대비해서 눈물을 좀 닦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네. 사실 좀 창피할 정도로 많이 울긴 했습니다 -_-;

아역들의 연기 이야기를 안할수가 없네요. 도대체 이 감독은 매번 어디서 이런 아이들을 캐스팅해오는 걸까요? 아니면 그만의 아이들에 대한 연기지도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기에 이런 연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감탄하며 연기를 보게 됩니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마법같은 씬도 여럿 있습니다. 제게 특히 남은 장면은 아이 엄마가 케이타를 데리고 오는 기차안에서의 씬입니다. 그들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가 마무리되는 순간 기차가 멈추어서는데 타이밍과 미장센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인 시간의 흐름을 묘사하는 편집 역시 매번 훌륭합니다.

음악의 사용도 참 좋습니다.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메인 테마로 사용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글렌 굴드 버전으로 사용되었군요. 이 영화의 주제와 글렌 굴드의 유사점에 대해서는 씨네21의 우혜경 평론가의 흥미로운 분석도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걸어도 걸어도"에 비하면 근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나 이번 영화는 보다 대중적인 눈높이를 고려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에게 다가서는 적절한 위치를 아직까지는 잘 찾아 들어가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유사가족에서 대안을 찾는 방식은 봉준호 감독과 비교해 봐도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길 것 같습니다. “괴물”, “설국열차”등과 함께 얘기해도 되겠지요. 아니면 모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마더”와 함께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꾸만 수다스럽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극장에서 돌아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는 그의 영화에서의 카메라처럼 아주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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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film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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